이번에 샬롯지역에서 열린 샬롯지역대부흥성회는 그 자체로는 나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성회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 나 자신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지난 이 즈음에 왜 내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부족했는지 돌이켜 보고 반성의 계기로 삼아보려고 한다.
첫번째, 이번 성회 준비 기간중에 나는 딸아이를 유스그룹 부흥회를 위한 찬양준비모임에 데려다 주기 위해 여러 차례 샬롯한인장로교회를 오고 갔다. 그 과정에서 유스그룹의 찬양준비모임이 학생들의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빼앗는 것에 매우 화가 났었다. 주말 토요일과 주일 오후에 매일 5시간 이상을 연습시키는 것에 질려 버렸다. 아니 모임에 오고 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거의 6시간을 연습한 셈이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데 많은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이해하지만 그들이 중고등학생으로 한참 학교 공부에 충실해야 할 시기인 것을 감안하면 지나친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딸아이를 이번 찬양준비모임에 참석토록 권유한 터라 부흥회 끝날 때 까지 속으로 화를 삼켜야 했다. 딸아이의 시험기간과 겹쳐 아마 딸 아이는 시험을 제대로 치루지 못했을 것이다. 한 밤중까지 시험 공부하느라 딸 아이의 방에 불이 늦게 까지 켜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안스러웠다. 그런 마음 속에서 부흥회에 참석했으니 은혜를 받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마지막 날에 아들을 유스그룹 예배에 데려다 주려고 갔었는데 예배 장소가 바뀌어서 크라이스트 커버넌트 교회의 건물들을 일일히 찾아 다니느라 진을 빼는 바람에 막상 부흥회 시간에는 늦게 도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머피의 법칙인가?
두번째, 이번 부흥회를 위해 직간접으로 기여한 것이 없었다. 지난 부흥회때는 연합성가대원으로 참석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신학교 공부를 이유로, 교회 전도사 일을 이유로 부흥회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나의 신앙경험상 은혜를 받으려면 어떤 형태로든지 부흥회에 간여해야 하는 데 그러지 못했다. 부흥회에 직접 간여하지 못하더라도 기도로서 부흥회의 성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기를 사모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 나는 은혜를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었다.
세번째, 그래서 그런지 첫날 집회때부터 찬양이 전혀 은혜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집회때 인근 프라비던스 하이 스쿨앞에서 사고가 나서 차들이 전혀 움직이지 못해 부흥회 참석자들이 많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첫날 집회때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오늘 오후에 YMCA 운동장을 속보로 걷는 동안 여러가지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이번 부흥회에 관한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폴(Paul)! 너는 이번 부흥회를 결과만 보는 것 같구나. 찬양을 하는 사람들의 실력, 참석자들의 수, 진행의 매끄러움, 강사 목사님의 영력 등 겉으로 들어난 것 들을 소중히 여기는 구나. 그러나 나는 너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단다. 나는 이번 찬양 그룹들이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주에서 자기 일들을 제쳐두고 열정을 가지고 참석해서 내가 준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나를 찬양했다는 것을 안단다. 나는 그들이 자랑스럽다. 그들의 찬양을 기쁘게 받았다. 나는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이 부족한 데도 그들이 가진 힘을 다하려고 한 것을 보았다. 폴! 너의 생각을 바꾸어라. 나는 결과도 소중히 여기지만 그 보다 과정을 더욱 소중히 여긴단다.' 나는 하나님이 마음에 주신 이 말씀에 회개하는 심령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방관자 처럼 멀찌거니 떨어져 지켜만 보고 있었던 나의 태도에 대해 부끄러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님! 저의 생각이 얕고, 경솔했던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주님의 생각이 저의 생각과 다름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를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저의 생각의 꽉 막힌 부분을 뚫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저의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Monday, October 16, 2006
Saturday, September 16, 2006
운칠기삼
사람은 누구나 그 안에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본성을 지니고 있다. 외모나 사회적 지위나 지적 능력 등에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이라도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그의 드러난 면 만이 아니라 그의 숨겨진 진실도 함께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운동경기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운이 70%이고 기술이 30%라고 한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지를 떠나서 스포츠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경기 당일의 운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일평생도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유전적 영향이 70%, 그가 처한 환경의 영향이 30%라고 한다. 유전적인 요소는 생물학적으로 DNA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또 다른 사람은 좋지 못한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 자신의 의지가 관여할 틈이 전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인생의 나머지 30%를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운칠기삼이라고 해서 실력을 소홀히 한다면 어떤 팀도 장기적으로 승률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유전적인 영향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나머지 30% 자신의 노력에 따라 우리는 인생의 방향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30%의 마진에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운동경기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운이 70%이고 기술이 30%라고 한다.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인지를 떠나서 스포츠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경기 당일의 운이 큰 영향을 미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의 일평생도 부모로 부터 물려 받은 유전적 영향이 70%, 그가 처한 환경의 영향이 30%라고 한다. 유전적인 요소는 생물학적으로 DNA를 통해 전해지는 것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또 다른 사람은 좋지 못한 부모에게서 태어난다. 그 자신의 의지가 관여할 틈이 전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에 따라 인생의 나머지 30%를 바꾸어 나갈 수 있다.
운칠기삼이라고 해서 실력을 소홀히 한다면 어떤 팀도 장기적으로 승률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유전적인 영향이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나머지 30% 자신의 노력에 따라 우리는 인생의 방향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30%의 마진에 자신의 모든 힘을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Tuesday, September 12, 2006
목사경영자(PastorPreneur) 번역 후기
최근 몇 년 사이에 성경원리를 기업경영이나 자기경영 분야에 적용한 책들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 왔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성경은 세상의 다른 어떤 고전들보다도 인간의 삶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기업경영이나 자기경영의 원리들을 교회 운영이나 성도들의 삶에 적용하는 책들은 많지 않았다. 그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심어져 있는 성속을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업경영이나 자기경영의 원리들도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다. 똑 같은 주방용기라도 시내 음식점에서 사용되면 그것은 돈을 버는데 사용되는 도구이지만,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사용되면 성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과 교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도 그 분을 위해 거룩하게 사용될 수 있다.
존 잭슨 목사님의 목사경영자(pastorpreneur)를 번역하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존 잭슨 목사님은 카지노장이 많기로 유명한 미국 네바다주의 카손밸리시에서 교회를 개척한 후 5년도 채 안되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낸 분으로서 앞으로 미국 교계에 큰 영향을 끼칠 젊은 목사님이시다. 그 분은 이 책에서 복음의 내용은 절대 변할 수 없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계시다. 나는 전적으로 그 분의 견해에 동의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이나 구 공산권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행전적인 기적을 동반한 채 크게 전파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만을 이야기 하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곳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시는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졌던 기적들이 그런 지역에서는 쉽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전에 기독교 국가로 유명했던 유럽에서는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한 때 수 천 명이 모여 예배드리던 교회들은 지금은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선진국 중에서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고, 지역사회와 사회전체에 바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미국 교회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는 살아 있다. 특별히 존 잭슨 목사님 같은 분들이 있는 한 미국 교회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죠나단 에드워드 목사님 시대의 대부흥운동이 다시 미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존 잭슨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뜨거운 열정을 가진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교회를 개혁해 나가시는 분이시다. 교회도 기업이나 사회단체와 같이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운영에도 기업경영에 적용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만 바로 선포되면 저절로 부흥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왜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갈수록 힘을 잃고 있는가? 특별히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교회의 교인들의 수는 감소 추세로 바뀌었다고 한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예전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못했던 국가들이나 지역에서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제 어지간히 뛰어난 목사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훌륭히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말씀이 홍수처럼 넘쳐 나지만 진작 사람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계속 운영하는 것이 해답인가?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들의 죄로 물든 심성 때문이거나 세상의 저속한 문화들 때문이라고 비난만 하고 교회는 독야청청해야 할 것인가? 주님은 세리와 창녀들을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예화를 들어 복음을 설명해 주셨다. 또한 사람들이 그 분께로 나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을 먼저 세상 속으로 보내셨다. 존 잭슨 목사님은 현대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그 분은 교회운영에도 기업경영과 같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수립해서 가능한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존 잭슨 목사는 그 일을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로 나오기 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 속으로 다가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교회가 그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복음 증거가 있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교회 혼자서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는 지역단체와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가지라고 권유하고 있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동떨어져 지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of the world)이 아니지만 세상 속(in the world)에서 살아가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나쁜 문화나 정신에 물들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두려워 세상 밖에 머물러서는 더욱 안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가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과 뱀과 같은 지혜로움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에, 전략적 사고는 뱀과 같은 지혜로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을 이루어 내려면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에도 존 잭슨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목사님과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계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목사님과 교회지도자들이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한다. 물론 생각만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존 잭슨 목사는 이에 대해 로버트 W. 서비스의 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약하고, 연약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며
바이킹의 심장과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승리를 가져 온다
그들은 필사적이고, 억세고, 물러설 줄 모르며, 두려움이나 패배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내가 가진 보배로 장식 드리우고, 내가 가진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을 것이다. - 로버트 W. 서비스(Robert W. Service)의 "유콘의 법칙(Law of the Yukon)"중에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해 새로운 사고와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많은 목사님과 교회리더들이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2006. 9. 9일
존 잭슨 목사님의 목사경영자(pastorpreneur)를 번역하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분명해졌다. 존 잭슨 목사님은 카지노장이 많기로 유명한 미국 네바다주의 카손밸리시에서 교회를 개척한 후 5년도 채 안되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낸 분으로서 앞으로 미국 교계에 큰 영향을 끼칠 젊은 목사님이시다. 그 분은 이 책에서 복음의 내용은 절대 변할 수 없지만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법은 시대에 맞게 새롭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계시다. 나는 전적으로 그 분의 견해에 동의한다. 오늘날 제3세계 국가들이나 구 공산권 국가에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도행전적인 기적을 동반한 채 크게 전파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만을 이야기 하는 데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곳에서 선교사로 사역하시는 분들의 간증을 들어 보면 예수님 당시나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졌던 기적들이 그런 지역에서는 쉽게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예전에 기독교 국가로 유명했던 유럽에서는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 한 때 수 천 명이 모여 예배드리던 교회들은 지금은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선진국 중에서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고, 지역사회와 사회전체에 바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 미국 교회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교회는 살아 있다. 특별히 존 잭슨 목사님 같은 분들이 있는 한 미국 교회는 쇠퇴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죠나단 에드워드 목사님 시대의 대부흥운동이 다시 미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존 잭슨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뜨거운 열정을 가진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이성을 가지고 교회를 개혁해 나가시는 분이시다. 교회도 기업이나 사회단체와 같이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운영에도 기업경영에 적용되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기도 열심히 하고, 말씀만 바로 선포되면 저절로 부흥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런데 왜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갈수록 힘을 잃고 있는가? 특별히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 교회의 교인들의 수는 감소 추세로 바뀌었다고 한다. 앞서 잠시 언급한 대로 예전에 기독교가 전파되지 못했던 국가들이나 지역에서는 사람들에게 성경말씀을 그대로 전하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이제 어지간히 뛰어난 목사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훌륭히 설교를 해도 성도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말씀이 홍수처럼 넘쳐 나지만 진작 사람들은 목말라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교회를 계속 운영하는 것이 해답인가? 사람들이 교회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들의 죄로 물든 심성 때문이거나 세상의 저속한 문화들 때문이라고 비난만 하고 교회는 독야청청해야 할 것인가? 주님은 세리와 창녀들을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시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셔서 그들과 먹고 마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 그리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예화를 들어 복음을 설명해 주셨다. 또한 사람들이 그 분께로 나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을 먼저 세상 속으로 보내셨다. 존 잭슨 목사님은 현대적인 방법으로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별히 그 분은 교회운영에도 기업경영과 같이 전략적 사고가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전략적 사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들을 체계적으로 수립해서 가능한 모든 자원을 사용해서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존 잭슨 목사는 그 일을 위해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로 나오기 까지 기다리지 말고, 먼저 교회가 세상 속으로 다가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교회가 그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복음 증거가 있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만일 교회 혼자서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는 지역단체와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가지라고 권유하고 있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동떨어져 지낼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것(of the world)이 아니지만 세상 속(in the world)에서 살아가야 한다. 교회가 세상의 나쁜 문화나 정신에 물들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두려워 세상 밖에 머물러서는 더욱 안 된다. 교회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가 그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과 뱀과 같은 지혜로움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에, 전략적 사고는 뱀과 같은 지혜로움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교회가 오늘날 당면하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흥을 이루어 내려면 종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어렵다고 본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한국에도 존 잭슨 목사님과 같은 훌륭한 목사님과 교회 지도자들이 많이 계신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목사님과 교회지도자들이 새로운 사고를 가져야 한다. 물론 생각만 바뀌어서는 안 된다. 그 생각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실천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존 잭슨 목사는 이에 대해 로버트 W. 서비스의 시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약하고, 연약하고, 유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승리를 가져오지 못하며
바이킹의 심장과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승리를 가져 온다
그들은 필사적이고, 억세고, 물러설 줄 모르며, 두려움이나 패배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내가 가진 보배로 장식 드리우고, 내가 가진 고기를 함께 나누어 먹을 것이다. - 로버트 W. 서비스(Robert W. Service)의 "유콘의 법칙(Law of the Yukon)"중에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해 새로운 사고와 이를 실천으로 옮기는 많은 목사님과 교회리더들이 배출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2006. 9. 9일
Friday, August 18, 2006
마지막 때를 준비하며 살자!
어제 오후에 같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박교수님댁을 찾아 갔다. 지난 주에 몸이 편챦아서 교회에 못 나오셨다기에 건강이 어떠신지 보고, 마음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심방했다. 지난 번에 두 번이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때의 기억을 참고로 찾아가면 되리라 생각했으나 가는 도중에 기억이 잘 나지 않아 한참 고생을 했다. 결국 박교수님 댁에 전화를 드려 길을 물었는데 교수님이 직접 차를 몰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셨다. 교수님은 다행히 건강하셨으나 다리가 불편하신지 조금 절고 계셨다. 80이 넘으신 나이에도 늘 건강하셨는데 지난 주 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교수님 댁에서 권사님이 차려 주신 맛있는 식사를 나누고, 교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사님께서 교수님의 형제분들 이야기를 재미 있게 해 주셨다.
교수님 집을 떠나면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 생각이 났다. 지금은 고향 뒷 동산 양지바른 곳에 누워 계신다. 내가 고향 큰 아버지 집에 갈 때 마다 군불을 때고 난 후에 고구마를 구워서 사촌형제들 몰래 내 손에 쥐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90이 넘게 이 세상에 계셨셔니 천수를 누리신 셈이다.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가족 중 누구도 할머니의 삶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내게 보여주신 사랑은 아직도 마음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얼마 전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을 읽었다. 모리라는 교수가 근육이 사그라드는 중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그와 제자가 대화의 형태로 자세히 묘사한 책이다. 모리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죽음은 탄생 처럼 인생의 중요한 한 과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다.
매일 아침 나에게 주어진 남은 날이 오늘 하루 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인생을 의미있고, 소중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이 세상에서 보낸 즐거운 날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예비해 두신 더 좋은 본향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교수님 집을 떠나면서 오래 전에 돌아가신 친할머니 생각이 났다. 지금은 고향 뒷 동산 양지바른 곳에 누워 계신다. 내가 고향 큰 아버지 집에 갈 때 마다 군불을 때고 난 후에 고구마를 구워서 사촌형제들 몰래 내 손에 쥐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90이 넘게 이 세상에 계셨셔니 천수를 누리신 셈이다.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가족 중 누구도 할머니의 삶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내게 보여주신 사랑은 아직도 마음 속에 깊이 남아 있다.
얼마 전에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라는 책을 읽었다. 모리라는 교수가 근육이 사그라드는 중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과정을 그와 제자가 대화의 형태로 자세히 묘사한 책이다. 모리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의연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죽음은 탄생 처럼 인생의 중요한 한 과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작과 끝이 있다. 그것은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다.
매일 아침 나에게 주어진 남은 날이 오늘 하루 뿐인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인생을 의미있고, 소중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이 세상에서 보낸 즐거운 날들에 대해 감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예비해 두신 더 좋은 본향을 향해 기쁜 마음으로 갈 수 있다면 그 인생은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Tuesday, August 01, 2006
속도 보다는 완주에 목표를 두라
40대는 마라톤에 비유하면 막 반환점을 돌아서는 시기이다. 지금껏 살아온 인생의 탄력으로 무리하지 않고 제 속도를 유지하면 완주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듯 하다. 문제는 속도에 촛점을 맞출 때 발생한다. 속도를 의식하다 보면 몸이 긴장되고, 자신의 페이스를 놓치기 쉽다. 그러다 보면 도중에 지쳐 포기하게 된다. 속도 보다는 완주에 목표를 두고 제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40대의 삶의 지혜이다.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원희룡씨가 '서브 쓰리를 꿈꾼다'라는 마라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아마츄어 마라토너로서 42.195Km를 3시간 안에 주파한다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다. 시간당 14Km의 속도는 1 Km를 4분 30초의 속도로 달리는 것과 같다. 5Km 또는 10Km를 Km당 4분 30초로 달리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이지만 마라톤 전 코스를 그와 같은 속도로 계속 달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아마츄어 마라톤에서 우승하려면 적어도 2시간 30분대 이내의 속도여야 한다.
그런데 원의원은 왜 서브 스리를 꿈꾸는가?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때 사람들은 큰 성취감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서브 쓰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서브 쓰리가 아니면 또 어떤가? 오늘 보다 내일은 좀 더 나은 속도로 달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속도가 그대로이면 또 어떤가? 오늘도 어제처럼 건강하게 달릴 수 있는 것 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닌가? 40의 나이에 삶의 사는 지혜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다른 말로 지족의 삶이다. 자신에게 관대할 필요가 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 하고 있는 일, 가족, 취미생활 등에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삶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브 쓰리가 아니라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마라톤 전코스 완주를 위해, 아니 풀코스 완주가 어렵다면 하프코스 완주를 위해 오늘도 즐겁게 신발끈을 고쳐매고 나서 보라. 인생이 즐겁지 아니한가?
한나라당 국회의원인 원희룡씨가 '서브 쓰리를 꿈꾼다'라는 마라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아마츄어 마라토너로서 42.195Km를 3시간 안에 주파한다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다. 시간당 14Km의 속도는 1 Km를 4분 30초의 속도로 달리는 것과 같다. 5Km 또는 10Km를 Km당 4분 30초로 달리는 것은 그나마 쉬운 일이지만 마라톤 전 코스를 그와 같은 속도로 계속 달리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아마츄어 마라톤에서 우승하려면 적어도 2시간 30분대 이내의 속도여야 한다.
그런데 원의원은 왜 서브 스리를 꿈꾸는가? 그것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할 때 사람들은 큰 성취감과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서브 쓰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서브 쓰리가 아니면 또 어떤가? 오늘 보다 내일은 좀 더 나은 속도로 달리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속도가 그대로이면 또 어떤가? 오늘도 어제처럼 건강하게 달릴 수 있는 것 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닌가? 40의 나이에 삶의 사는 지혜는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다른 말로 지족의 삶이다. 자신에게 관대할 필요가 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들, 하고 있는 일, 가족, 취미생활 등에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삶을 즐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서브 쓰리가 아니라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마라톤 전코스 완주를 위해, 아니 풀코스 완주가 어렵다면 하프코스 완주를 위해 오늘도 즐겁게 신발끈을 고쳐매고 나서 보라. 인생이 즐겁지 아니한가?
Friday, July 21, 2006
그리스도인의 기쁨(Joyful Christian)
현대인은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와 오늘날을 비교하면 너무 많은 것이 변해서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물질문명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의 생활을 깊숙이 들여다 보면 현대인이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부유하게 살고 있지만 옛날사람들에 비해 그만큼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 중에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주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물질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해 하고,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변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옛날에 비해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은 더욱 늘어 가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늘 마음 한편에 외로움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은 여전히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게 두려워 하며 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잠시 동안 기쁨을 누릴 때도 있습니다. 잠시 동안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고, 얼마 안가서 새로운 고민거리로 괴로와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근심을 잊어 버리기 위해 술이나 약물, 섹스, 도박, 쇼핑 등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사람의 오감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독증세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똑 같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고, 결국 사람의 몸과 정신을 망치게 만듭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현대인은 예수님 시대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실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누리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대체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솔로몬처럼 부유하고, 지식이 많고, 왕과 같이 높은 신분이 되면 그와 같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올림픽 선수 처럼 건강한 몸을 가지거나,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운 몸을 가질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와 같이 되면 우리는 잠시 동안 기쁨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다른 기쁨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진정한 기쁨을 2000년 전 로마의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지내던 한 유대인 죄수가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한 죄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생사를 판가름 짓는 마지막 재판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가 그토록 누리기를 원하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 들과 함께 그 죄수가 처해 있던 상황과 그가 누리고 있던 진정한 기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 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기쁨의 내용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가 개척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실라가 유럽대륙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대왕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도시로서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지역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자세한 경위가 나와 있습니다. 당초 바울 일행은 아시아 지역에 먼저 복음을 전할 예정이었으나 성령이 이를 못하게 여러 번 막었습니다. 그 대신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도착해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구하러 나갔다가 강가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서 그녀와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 밑에서 돈을 벌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러날을 그렇게 좇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여종의 주인이 자기 돈줄이 끊어진 것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을 찢기고 매로 많이 맞은 후에 발을 착고에 채인 후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는데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하고 그를 말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간수와 그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런 우연곡절을 거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그 곳을 떠나 선교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여러 차례 물질로 후원하였고, 특별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에바브로디도라는 성도를 통해 헌금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을 뻔 하다 간신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돌려 보내면서 그를 통해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 그가 처해 있던 형편을 살펴 봅시다.
1)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생사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별도의 독립된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으며 자신의 생사에 대해 자신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 오는 구전에 따르면 바울은 후에 로마의 감옥에서 목이 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2)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 몸이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자신의 육체적 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병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 명칭은 그 병이 주는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병이 떠나가도록 주님께 세 번 씩이나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도 이 고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3) 바울은 자신이 믿었던 일부 사람으로 부터도 배신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17절에 보면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바울은 이 때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몸이 매우 쇠약해진 상황이었고, 누가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도와 주기는 하였지만 감옥안에서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처한 상황은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기쁨을 누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자신보다 훨씬 자유롭고, 건강하며, 물질적으로 풍부한 형편에 있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빌립보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이 편지 어느 곳에도 바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슬퍼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에게 베풀어 준 도움에 감사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정한 기쁨의 비밀을 전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 형편에 관계없이 진정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곧 성령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기쁨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 다음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에 복음을 전하느라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 고통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 같이 슬픈 일을 당하면 슬퍼하고, 채찍을 맞았을 때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달랐던 것은 그와 같은 고통의 순간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와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바울은 구원의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들이 구원의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신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죄에 대해 가슴이 무디어진 것 처럼 구원의 감격에 대해서도 무디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 가졌던 옛사랑의 기쁨을 되살려 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까지 그 분의 몸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라진 교회는 죽은 교회와 같습니다. 이런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내가 구원의 감격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우리에게 주신 촛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원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장 13절 이하에서 예수 믿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은혜로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의 사명을 받았으니 그 은혜가 큰 것입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신용카드 빚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는 자살하는 대신 그를 찾아가서 수 백 번 절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와 같은 죄사함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예수 믿기 전에 나의 모습을 잊어 버린 것이 아닙니까?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라 철이 든 후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중학교 때 처음 교회를 나온 후에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해 많이 방황하였습니다. 성당에도 다니고, 불교에도 한동안 심취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좇아 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기 전의 나의 모습은 바울이 말한 대로 죄인 중의 괴수와 같았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오늘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저는 여러분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기쁨을 저는 앞으로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바울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 및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주님은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때때로 그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하였으나 주님은 이를 들으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만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때때로 'No'가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다려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십여년 전에 미국에 경제학 공부를 하러 오던 때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저는 30대 중반에 목회자가 되려는 생각을 자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경을 읽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퇴근하면 잠자기 전까지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고 응답을 받으면 직장을 그만 두고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 먹고 회사생활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회사에서 보내 주는 유학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34살이었는데 부랴 부랴 토플시험 치고 지원을 했으나 첫해에는 선발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선발에서 떨어진 후 한 달 정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 더 기회가 있어서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승진을 해서 부서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 부서에는 저 말고 이미 유학을 준비 중인 사람이 5명이 더 있었습니다. 저는 순서로 보면 6등이 되지요. 더욱 문제인 것은 우리 과에 전입고참이 있어서 저는 과에서도 2등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년 제가 속해 있는 부서에서 유학을 올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세 명이고 한 과에서 두 명을 보내 줄 가능성은 100%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에 그냥 도와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기도를 해 보더니만 반드시 갈 수 있다고 자신있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회사 사정을 알기에 아내의 말을 100%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저도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최악의 경우 유학을 오지 못하더라도 크게 상심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직장 신우회에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말 저에게 중요한 임무가 떨어지고 저는 그 일을 연말까지 무사히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에 휴가를 내고 가족과 함께 설악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휴가를 간 날 회사에서 특별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는 연말에 보너스를 현금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퇴근을 하지 않고 연말분위기에 휩쓸려 직장에서 카드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해는 다른 해와 달리 그 날 저녁에 회사 내 한 부서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누군가 훔쳐 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처음에는 쉬쉬하면서 조용히 지나가려다 우연히 윗 선에서 아시고 남대문 경찰서에 본격적으로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회사에서 카드를 친 사람들을 인사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 부서에서 유학지원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제2순위자가 다른 부서로 전보 발령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일로 제가 5순위자로 한 등급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우리 과에 있는 전입 고참으로 인해 과내 2순위이기 때문에 유학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인사부서에서 자리가 비어 적임자를 물색하는데 우리 과에 전입고참을 불러 갔습니다. 그 때 전입고참이 인사부서로 발령가면서 저에게 한 말이 아직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김대리가 유학을 가게 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이루어지는 것이 심상치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과에서 1순위가 되고 결국 유학을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제가 그 때 유학 온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짜 대단한 것은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10년 동안 연단하시면서 겸손을 배우게 하시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마음을 가지게 하시고 이렇게 주의 종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제가 30대 중반에 간절히 기도하였던 일을 주님께서는 잊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10년이 지난 올해 저를 신학 공부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아내의 마음도 변하게 해 주셨습니다. 10년 전에는 주님이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아서 주님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왜 주님께서 저에게 침묵하셨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 중에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먼 훗날에 주님의 귀한 뜻을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훗날 주님을 뵈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쉬지말고 기도하는"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울은 전도의 결실로 인해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혼구원에 대한 사명을 쉽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면서 로마감옥에 갇혀서도 전도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었던 양의 비유를 통해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 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전도의 결실로 인한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릭워렌 목사는 자신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자기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순간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릭 목사님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셨는데 평생 교회개척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암에 걸려 병상에서 돌아 가실 때에도 전도만 생각하셨는데 임종직전에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시고 정신이 들 때 마다 손을 허공으로 저어시며 'one more for Jesus"(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께로)를 계속 되풀이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이 곳에 와서 한 가정을 마음에 두고 전도를 진행 중인데 그 분의 마음이 잘 열리지 않아서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곳 샬롯이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기는 하지만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데 항상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기쁨을 누렸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하면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말하시면서 천국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예비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처소를 마련한 후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이십니까? 여러분의 지내 온 인생이 어떠했습니까? 야곱이 나이 들어 요셉의 초청으로 그의 아들들과 애굽으로 건넌 간 후 애굽의 바로를 만났습니다. 그때 바로가 야곱에게 너의 인생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을 때 내 인생이 '험악'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보다 더욱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힘든 여정이 끝나는 날 우리는 천국 문 앞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우리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태도는 그와 같은 두려움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서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태아가 어미의 배 속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것으로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주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내가 다른 모든 것은 못 믿어도 주님 말씀 만은 믿는다는 굳은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힘든 노정을 기쁘게 이겨내시고 마침내 천국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오늘 바울 사도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육체적 질병과, 믿었던 사람으로 부터의 배반과, 감옥에 갇혀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는 상황에서도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전도의 결실을 통하여, 천국에 대한 소망을 통하여 이 땅이 줄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오늘 머리 숙인 저희들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06.07.27 남부한인장로교회 수요예배 설교
본문: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본문: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제목: 그리스도인의 기쁨(Joyful Christian)
Tuesday, May 23, 2006
좋은 우정을 맺어 가는 법

우정은 인생에서 매우 소중하며 한 사람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우정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힘들며 상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잠언에 기록된 대로 좋은 친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두 함께 합니다.(잠언 17:17) 또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잠언 27:17) 서로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는 시너지 효과가 있어서 각자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9-12)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두 마리의 말은 9,000파운드 정도를 끌 수 있는 데 비해 4마리의 말은 그 두 배인 18,000파운드가 아니라 30,000파운드 정도까지 끌 수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챤 심리학자인 래리 크랩 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좋은 우정은 사람의 병까지 낫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정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우정을 쌓는 데는 선천적인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우정의 요소(the friendship factor)'의 작가 알란 로이 맥기니스(Dr. Alan Loy McGinnis)는 '우정을 쌓는 기술은 노력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 남녀 간의 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정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우정에서 비롯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사람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정이나 사랑은 모두 친밀한 인간관계(intimacy)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사람은 둘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수줍은 성격 때문에 우정을 제대로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조용한 성품 보다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의 부족이 우정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더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자신은 과거에 여러 차례 우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좋은 우정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가 미래에도 계속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면 앞으로는 좋은 우정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우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힘들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정을 포함해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더 오래 살고, 일의 결과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려면 친구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친구의 선택 기준으로는 크게 지혜(잠언 13:20), 좋은 인품(고린도전서 15:33), 신앙(고린도후서 6:14-15)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와 같은 기준을 만족시키는 좋은 우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두 사람 모두 지혜와 인품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았습니다. 그들은 3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진정한 우정의 표상으로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우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인 동시에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속 까지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가 그 분이 명하는 대로 살아가면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의 가사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사귀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LifeChangeMinistry(2006.5.23): 무단 전재 및 인용을 금합니다.
커피 한 잔과 신앙

며칠 전에 시내 백화점에 가서 에스프레소 커피 제조기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가격은 5만원정도로 그렇게 비싸지 않은 수동식 제품입니다. 원래는 전자동식 에스프레소 커피 제조기에 관심이 있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내와 함께 시내 백화점에 다른 볼 일로 가는 참에 마음먹고 수동식 제품을 하나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스타벅스에 갈 때 마다 카운터 너머로 훔쳐보던 배리스터들의 능숙한 솜씨를 흉내내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만들어 보았으나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커피점에서 배리스터들이 하는 것을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막상 직접 해 보니 전혀 엉뚱한 커피 맛이 나왔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기계 탓일까? 커피 탓일까? 아니면 솜씨 탓일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원인을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 놓은 아까운 커피를 버릴 수 없어서 아내와 함께 우리들의 실수(?)를 농담 삼아 쓴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아내는 결혼 때부터 커피를 좋아했지만 나는 커피 보다는 녹차나 중국차를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맛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몇 모금 훔쳐 먹어 보았지만 그 때는 커피의 맛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든 내가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스타벅스 커피회사의 창설자인 하워드 슐츠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그 때 나는 대기업의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일중 하나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매달 한 차례씩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의 주제가 될 만한 것을 찾아서 신간서적을 눈여겨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워드 슐츠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은 한갓 커피 판매점에 불과한 회사가 어떻게 포브스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세계적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슐츠 회장의 자서전을 읽고 난 뒤 그의 경영철학과 스타벅스라는 회사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타벅스의 기업 정신이 ‘정직, 성실, 창의성’이라는 것을 알고 그 회사의 급성장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피 매장에 근무하는 파트타임 직원들에게까지 우리 사주를 나누어 주는 슐츠 회장의 상생의 경영철학은 인간적으로 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임원회의에서 특강을 해 줄 강사를 섭외하기 위해 그 책을 번역한 분을 지하철 압구정동역 앞에 있는 스타벅스 가게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은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스타벅스 가게였고, 그 곳에서 처음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추천한 커피는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였는데 얼음을 빙수처럼 잘게 갈아서 에스프레소 커피와 시럽을 함께 넣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커피하면 사무실에서 손님들에게 접대할 때 사용하는 일회용 커피나 맥심과 같은 냉동커피 만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스타벅스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는 커피에 대한 나의 지평을 완전히 새롭게 열어 주었습니다. 그 때 이후 나는 스타벅스의 열렬한 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원회의 때 그 분을 초청해서 특강을 하려던 계획은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올해 4월로 19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내년 이면 결혼 20주년이 됩니다. 몇 주 전 교회성도들과 서로의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 20년이면 은혼식이 된다는 한 성도의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 20년이 금방 지나 간 것 같았는데 벌써 은혼식이라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결혼 20년을 큰 문제없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남은 결혼생활에 대한 책임감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내와 내가 큰 다툼 없이 오랜 결혼생활을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가족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삶은 예수님과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결혼초 부터 하나님과 교회중심의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고, 결혼생활과 함께 신앙생활도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입니다. 우리 부부에게도 때때로 큰 문제가 생겼지만 그 때마다 주님께로 나아가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한 번은 아내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드리는 데 주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라는 말씀을 통해 나를 권면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이기적인 나의 생각과 태도를 회개하고 아내를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앙생활 외에 스타벅스 커피를 통해 아내와 나는 공통점을 한 가지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커피를 시켜 놓고 그 온기를 느끼면서 교회일, 아이들 키우는 일, 친구들 일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갑니다. 원래 나는 말이 적은 편인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말이 많아집니다. 아내는 카라멜 마키아토를 좋아하고, 나는 커피 더블샷을 좋아합니다. 이제 에스프레소 기계를 구입했기 때문에 스타벅스에 갈 기회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솜씨가 부족해서 스타벅스의 커피가 그리워지지만 조만간 직접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가 특별한 맛을 낼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도 직접 만든 카푸치노 커피를 아내와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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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한 미국인과 스페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책의 제목을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의 시 ‘긴급한 경우에 바치는 기도’에서 인용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옮겨보면 “어느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자신만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전체의 한 부분이며 주류의 일부이다. 작은 모래톱이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그만큼 유럽은 작아지는 셈이다. ...... 나는 인류의 일부분이므로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리고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그가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고독보다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였던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박사는 ‘고독보다 더 무서운 독약은 없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우울증, 편집증, 정신분열증, 강간, 자살, 살인 등 각종 질병과 범죄의 중요원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보건성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혼자 지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조기사망 가능성이 3배나 높고, 정서적으로 탈진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4배, 심한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5배, 정서적, 정신적 장애로 병원 신세를 질 가능성이 10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중 속에서 고독을 누리는 것은 현대인의 병입니다. 현대인들은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마치 고슴도치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가까이 가 온기를 나누기를 원하지만 몸에 난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여러 가지 많은 단체나 조직에 속해 있지만 그 어디서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못하고 대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인간관계가 뛰어난 사람을 보면 그것을 그 사람의 타고난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런 재능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나아가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본능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은 본능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6가지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기(courage)를 가지고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두려워하는 마음 대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 성령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돌아볼(considerate)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에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친절을 베풀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아량도 베풀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는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덕이 되도록(constructive)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늘 날카로운 칼을 다룰 때처럼 조심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는 솔직하게(candid)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다른 사람과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갈등을 너무 두려워하여 문제를 미루거나 회피하거나 도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는 한 결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상대방과 건설적인 해결책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갈등의 터널을 지나는 것은 마치 여인이 출산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거친 후에야 아름다운 아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지 말아야(confidential) 합니다. 잠언 11장 13절에 보면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것만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해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소문을 퍼뜨려 남에게 피해를 준 한 청년이 유대인 랍비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을 달라고 했습니다. 랍비는 그에게 깃털이 든 베개를 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베개를 찢어 그 안에 든 깃털을 바람에 날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그 랍비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와서 그것이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이제 다시 가서 그 깃털들을 전부 찾아 가지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행동(commitment)을 해야 합니다. 결혼식에 가면 신랑 신부가 목사님 앞에서 선서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오늘날 하루에도 수천 쌍의 신혼부부가 결혼맹세를 하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3년 이내에 이혼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20년, 30년 오랜 결혼생활을 한 사람과 결혼한 지 몇 년 안에 이혼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바로 결혼에 대한 책임감의 차이입니다. 남남으로 만나 결혼생활을 하면서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에 대해 좋지 않는 감정이 들더라도 결혼생활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결혼생활의 고비를 넘어가게 도와줍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6가지 태도를 특별히 가정과 교회 내에서 우선적으로 취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는 세상의 다른 조직과 그 성격이 크게 다릅니다. 양 자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들에게 주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맞게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장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인간관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해 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행복해 지는 비결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변에 보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 선택의 자유, 그리고 장수의 축복을 감안하면 행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많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외관상으로는 행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실제로는 심한 좌절감과 피로감을 느끼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그 속에서 진정으로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21)고 했습니다. 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아담 부부를 죄에 빠뜨릴 때 까지 아담 부부는 세 가지 측면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분명한 사명 또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아내 이브와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담의 삶은 행복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족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올바른 일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일과 관계의 측면에서 몇 가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하더라도 지나친 성공추구의 욕망으로 극심한 피곤(burn-out)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보다는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일은 사람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일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생이란 일과 관계의 양대 축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회사나 사회를 위해 무슨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이나 열정과는 무관하게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인생은 마치 선장 없는 배가 바다 위를 목적지 없이 표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행히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서 만족을 누리고 있지만, 지나친 일의 부담으로 가족과 여가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80 시간 이상씩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밤늦게 퇴근하면서 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휴가철이 되어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밀린 일을 처리하러 직장에 출근하거나 해외출장으로 대신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일중독자(workaholic)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사람들 간의 관계단절은 일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정 내에서 부부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악화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직장 일로, 아이들은 학교 공부로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 가족이 함께 모여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직장 내에서도 지나친 경쟁 조장으로 직원 간에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늘날의 직장은 일만 있고, 인간적인 관계는 상실된 기형적인 조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과학문명의 발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20세기 포스터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시간이 갈수록 영혼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 않고 이 땅에서의 유한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해 주는 절대가치를 잃어버리고 미약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숙명적인 인간의 실존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영원 보다는 현재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게 되고,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위해 권력과 황금과 섹스를 탐닉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현대인은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의 일에서 새로운 사명과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일과 여가, 돈과 가정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넷째, 현재 보다는 영원의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이 올바른 사명의 발견과 관계의 회복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되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Monday, May 22, 2006
느헤미야의 위기
우리가 선한 결심을 하고 그 일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일이 점차 진행되어 가면서 내부적으로 힘이 달리기 시작하고, 외부적으로 방해하는 세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위기는 대개 일의 중간 단계쯤에서 생겨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무너진 성벽을 건축할 때의 일입니다. 처음 성벽을 건축할 때는 유대인들이 모두 힘을 내어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느헤미야와 유대인을 비웃으며 유대인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만큼 형편없다고 비꼬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그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성벽 건축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을 절반 쯤 완성했을 때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동안 주변에서 지켜보면서 말로서만 조롱과 비방하던 이방 민족들이 성이 점차 모습을 갖추어 감에 따라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내부에서도 처음 성을 건축할 때의 용기와 자신감은 사라지고 성벽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피곤과 좌절감과 느끼고, 이방 민족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벽 공사에 참가하지 않고 주변에 사는 유대인들은 느헤미야에게 열 차례나 찾아 와서 성벽 건축을 중단하고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오는 것이 안전하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들은 위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까?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으나 일이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 주변의 방해와 심신의 피곤함으로 도중에 포기한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때 어떻게 이 문제에 대처했습니까? 그리고 그 방법이 성공을 했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습니까?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느헤미야는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서 4장 4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적들의 침입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파수꾼을 두어 밤낮으로 방비를 했습니다. 그들의 절반은 성벽 공사에 참가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진 채 적들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벽 공사에 참가하는 자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일을 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도 벗지 아니한 채 잠을 자고,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무기를 들고 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철저한 준비와 노력으로 성벽 건축은 오십이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했던 이방 사람들이 성벽 건축이 성공한 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6장 16절에 보면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이겨내야 했고, 홍해라는 지형적 장애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갈증과 굶주림, 독사와 아말렉의 공격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고라와 그 일당들의 반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가나안의 견고한 성벽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장대함에 놀라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적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국 가나안 진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 같은 상황 하에서 적들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처한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느헤미야나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던 문제보다 더 크고 중대하십니까? 그 문제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할 만큼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느헤미야와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놓고 그 분의 도우심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크신 사랑을 신뢰하고,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들에게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마음을 새롭게 하라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은 분명히 우리 속에 있으면서 다른 어떤 것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올바르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즐겁습니다. 성경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메마르지 않는 샘물을 그 마음속에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맑은 생수가 솟아 나와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에게 까지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좋은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땅에 비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상태는 신체의 건강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많은 자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을 잃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평안한 자는 건강 상태도 좋아집니다. 잠언 15장 13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건물을 짓기도 하고, 비행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마음을 통해 우리는 음식을 만들고 즐거운 시간 또는 불행한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은 마치 큰 유조선을 움직이는 작은 스크루와 같습니다. 유조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방향을 선회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배의 선미에 달려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스크루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은 정결하지 못합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모두 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창세기 6장 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는 언제나 악한 냄새를 풍기게 마련입니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그 속에 악한 생각들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8장 2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오웬(sin and temptation)목사는 “성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내부에 배반세력이 있으면 그 성은 적들로부터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배반세력이 우리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 마음은 모든 유혹 앞에 쉽게 넘어가고 결국은 그들의 발 앞에 굴복하고 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은 물속에 잠겨 진 빙산과 비슷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물속에 잠긴 빙산처럼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동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광대한 우주와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마음을 지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 분만이 온전히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3편 15절에는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바꾸는데 전문가이십니다. 시편 51편 10절에서 다윗왕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주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바랄 때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통해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 중에 상한 심령으로 괴로워하는 분이 계신다면 주님께로 나와서 그 분의 위로함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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