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May 23, 2006

좋은 우정을 맺어 가는 법



우정은 인생에서 매우 소중하며 한 사람의 생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친구를 사귀기 위해 특별히 노력해야 합니다. 진정한 우정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노력만으로는 힘들며 상호 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잠언에 기록된 대로 좋은 친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모두 함께 합니다.(잠언 17:17) 또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잠언 27:17) 서로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좋은 친구는 시너지 효과가 있어서 각자 어떤 일을 하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전도서에서는 이러한 관계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9-12)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두 마리의 말은 9,000파운드 정도를 끌 수 있는 데 비해 4마리의 말은 그 두 배인 18,000파운드가 아니라 30,000파운드 정도까지 끌 수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챤 심리학자인 래리 크랩 박사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좋은 우정은 사람의 병까지 낫게 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정에 관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우정을 쌓는 데는 선천적인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베스트셀러 '우정의 요소(the friendship factor)'의 작가 알란 로이 맥기니스(Dr. Alan Loy McGinnis)는 '우정을 쌓는 기술은 노력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 남녀 간의 사랑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정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한 사랑은 우정에서 비롯됩니다.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없는 사람은 남녀 간의 사랑에서도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정이나 사랑은 모두 친밀한 인간관계(intimacy)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사람은 둘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수줍은 성격 때문에 우정을 제대로 발전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조용한 성품 보다는 친밀한 인간관계를 다룰 줄 아는 능력의 부족이 우정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더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째, 자신은 과거에 여러 차례 우정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좋은 우정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가 미래에도 계속 된다는 법칙은 없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하면 앞으로는 좋은 우정관계를 맺어갈 수 있습니다.

넷째, 좋은 우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너무 힘들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정을 포함해서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조사된 자료에 따르면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더 오래 살고, 일의 결과도 좋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는 좋은 친구를 사귀려면 친구 선택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좋은 친구의 선택 기준으로는 크게 지혜(잠언 13:20), 좋은 인품(고린도전서 15:33), 신앙(고린도후서 6:14-15)의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와 같은 기준을 만족시키는 좋은 우정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두 사람 모두 지혜와 인품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좋았습니다. 그들은 3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진정한 우정의 표상으로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우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인 동시에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우리의 가장 깊은 속 까지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가 그 분이 명하는 대로 살아가면 우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로 여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4-15) 찬송가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의 가사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을 가장 친한 친구로 사귀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구주 예수님은 아름다워라
산 밑에 백합화요 빛나는 새벽별 주님 형언할 길 아주 없도다
내 맘이 아플 적에 큰 위로되시며 나 외로울 때 좋은 친구라
주는 저 산 밑에 백합 빛나는 새벽별 이 땅 위에 비길 것이 없도다.

LifeChangeMinistry(2006.5.23): 무단 전재 및 인용을 금합니다.


커피 한 잔과 신앙


며칠 전에 시내 백화점에 가서 에스프레소 커피 제조기를 하나 구입했습니다. 가격은 5만원정도로 그렇게 비싸지 않은 수동식 제품입니다. 원래는 전자동식 에스프레소 커피 제조기에 관심이 있었는데 가격이 너무 비싸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아내와 함께 시내 백화점에 다른 볼 일로 가는 참에 마음먹고 수동식 제품을 하나 구입하게 된 것입니다. 집에 돌아와서 스타벅스에 갈 때 마다 카운터 너머로 훔쳐보던 배리스터들의 능숙한 솜씨를 흉내내어 에스프레소 커피를 만들어 보았으나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커피점에서 배리스터들이 하는 것을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았는데 막상 직접 해 보니 전혀 엉뚱한 커피 맛이 나왔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기계 탓일까? 커피 탓일까? 아니면 솜씨 탓일까? 곰곰이 생각해 봐도 원인을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만들어 놓은 아까운 커피를 버릴 수 없어서 아내와 함께 우리들의 실수(?)를 농담 삼아 쓴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아내는 결혼 때부터 커피를 좋아했지만 나는 커피 보다는 녹차나 중국차를 좋아했습니다. 아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맛있다는 말을 할 때마다 몇 모금 훔쳐 먹어 보았지만 그 때는 커피의 맛을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든 내가 커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스타벅스 커피회사의 창설자인 하워드 슐츠의 자서전을 읽고 나서 부터였습니다. 그 때 나는 대기업의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일중 하나는 임원들을 대상으로 매달 한 차례씩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서 강연회를 개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의 주제가 될 만한 것을 찾아서 신간서적을 눈여겨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워드 슐츠의 자서전을 읽게 된 것은 한갓 커피 판매점에 불과한 회사가 어떻게 포브스 100대 기업 안에 들어가는 세계적 기업으로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슐츠 회장의 자서전을 읽고 난 뒤 그의 경영철학과 스타벅스라는 회사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스타벅스의 기업 정신이 ‘정직, 성실, 창의성’이라는 것을 알고 그 회사의 급성장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피 매장에 근무하는 파트타임 직원들에게까지 우리 사주를 나누어 주는 슐츠 회장의 상생의 경영철학은 인간적으로 그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임원회의에서 특강을 해 줄 강사를 섭외하기 위해 그 책을 번역한 분을 지하철 압구정동역 앞에 있는 스타벅스 가게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은 내가 처음으로 방문한 스타벅스 가게였고, 그 곳에서 처음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추천한 커피는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였는데 얼음을 빙수처럼 잘게 갈아서 에스프레소 커피와 시럽을 함께 넣어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커피하면 사무실에서 손님들에게 접대할 때 사용하는 일회용 커피나 맥심과 같은 냉동커피 만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스타벅스에서 마신 ‘에스프레소 프라푸치노’는 커피에 대한 나의 지평을 완전히 새롭게 열어 주었습니다. 그 때 이후 나는 스타벅스의 열렬한 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원회의 때 그 분을 초청해서 특강을 하려던 계획은 아쉽게도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올해 4월로 19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내년 이면 결혼 20주년이 됩니다. 몇 주 전 교회성도들과 서로의 결혼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혼 20년이면 은혼식이 된다는 한 성도의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결혼 20년이 금방 지나 간 것 같았는데 벌써 은혼식이라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결혼 20년을 큰 문제없이 살아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남은 결혼생활에 대한 책임감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내와 내가 큰 다툼 없이 오랜 결혼생활을 지탱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가족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가족의 삶은 예수님과 교회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결혼초 부터 하나님과 교회중심의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고, 결혼생활과 함께 신앙생활도 자연스럽게 자라난 것입니다. 우리 부부에게도 때때로 큰 문제가 생겼지만 그 때마다 주님께로 나아가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한 번은 아내와의 관계가 너무 힘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로 나아가 간절히 기도드리는 데 주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5:12)라는 말씀을 통해 나를 권면해 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이기적인 나의 생각과 태도를 회개하고 아내를 더욱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신앙생활 외에 스타벅스 커피를 통해 아내와 나는 공통점을 한 가지 더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에스프레소 커피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아내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커피를 시켜 놓고 그 온기를 느끼면서 교회일, 아이들 키우는 일, 친구들 일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갑니다. 원래 나는 말이 적은 편인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말이 많아집니다. 아내는 카라멜 마키아토를 좋아하고, 나는 커피 더블샷을 좋아합니다. 이제 에스프레소 기계를 구입했기 때문에 스타벅스에 갈 기회가 별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에스프레소를 만드는 솜씨가 부족해서 스타벅스의 커피가 그리워지지만 조만간 직접 만든 에스프레소 커피가 특별한 맛을 낼 것으로 믿습니다. 오늘도 직접 만든 카푸치노 커피를 아내와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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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법


헤밍웨이의 유명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는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한 미국인과 스페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이 책의 제목을 17세기 영국의 시인이었던 존 던(John Donne)의 시 ‘긴급한 경우에 바치는 기도’에서 인용했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옮겨보면 “어느 누구도 고립된 섬이 아니며 자신만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전체의 한 부분이며 주류의 일부이다. 작은 모래톱이 바다에 씻겨 내려가면 그만큼 유럽은 작아지는 셈이다. ...... 나는 인류의 일부분이므로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고 묻지 마라;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해 울리고 있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그가 혼자 지내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위해 돕는 배필을 만드셨습니다. 고독보다 무서운 병은 없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저명한 심리학 교수였던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박사는 ‘고독보다 더 무서운 독약은 없다.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우울증, 편집증, 정신분열증, 강간, 자살, 살인 등 각종 질병과 범죄의 중요원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보건성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혼자 지내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조기사망 가능성이 3배나 높고, 정서적으로 탈진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4배, 심한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이 5배, 정서적, 정신적 장애로 병원 신세를 질 가능성이 10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대중 속에서 고독을 누리는 것은 현대인의 병입니다. 현대인들은 외로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마치 고슴도치가 날씨가 추워지면 서로 가까이 가 온기를 나누기를 원하지만 몸에 난 가시 때문에 가까이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여러 가지 많은 단체나 조직에 속해 있지만 그 어디서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지는 못하고 대중속의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인간관계가 뛰어난 사람을 보면 그것을 그 사람의 타고난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런 재능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나아가서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본능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고 싶은 본능이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새들백 교회의 릭 워렌 목사는 6가지 원칙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기(courage)를 가지고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갖기 위해 두려워하는 마음 대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께 성령 충만케 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기 위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을 돌아볼(considerate) 줄 알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4절에 보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친절을 베풀 때 하나님은 우리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아량도 베풀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는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셋째,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주변 사람들에게 덕이 되도록(constructive)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 사도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라고 우리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는 늘 날카로운 칼을 다룰 때처럼 조심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넷째,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는 솔직하게(candid) 자신의 감정을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다른 사람과 갈등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갈등을 너무 두려워하여 문제를 미루거나 회피하거나 도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는 한 결코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때로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상대방과 건설적인 해결책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갈등의 터널을 지나는 것은 마치 여인이 출산의 과정을 거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거친 후에야 아름다운 아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 다른 사람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리지 말아야(confidential) 합니다. 잠언 11장 13절에 보면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문을 퍼뜨리는 것만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해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소문을 퍼뜨려 남에게 피해를 준 한 청년이 유대인 랍비를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을 달라고 했습니다. 랍비는 그에게 깃털이 든 베개를 들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베개를 찢어 그 안에 든 깃털을 바람에 날려 보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그 랍비가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와서 그것이 전부냐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이제 다시 가서 그 깃털들을 전부 찾아 가지고 오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책임 있는 행동(commitment)을 해야 합니다. 결혼식에 가면 신랑 신부가 목사님 앞에서 선서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오늘날 하루에도 수천 쌍의 신혼부부가 결혼맹세를 하지만 그들 중의 상당수는 3년 이내에 이혼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20년, 30년 오랜 결혼생활을 한 사람과 결혼한 지 몇 년 안에 이혼하는 사람들의 차이는 바로 결혼에 대한 책임감의 차이입니다. 남남으로 만나 결혼생활을 하면서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경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부부싸움을 하고, 서로에 대해 좋지 않는 감정이 들더라도 결혼생활을 무너뜨려서는 안 되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결혼생활의 고비를 넘어가게 도와줍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6가지 태도를 특별히 가정과 교회 내에서 우선적으로 취해야 합니다. 가정과 교회는 세상의 다른 조직과 그 성격이 크게 다릅니다. 양 자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들에게 주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과 교회를 하나님이 주신 목적에 맞게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직장과 사회 공동체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사랑의 관계를 맺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것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주님의 명령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의 인간관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로 발전해 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행복해 지는 비결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변에 보면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인 풍요, 선택의 자유, 그리고 장수의 축복을 감안하면 행복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인데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로 많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외관상으로는 행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실제로는 심한 좌절감과 피로감을 느끼며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그 속에서 진정으로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로워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모순이 생겨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을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21)고 했습니다. 뱀이 이브를 유혹하여 아담 부부를 죄에 빠뜨릴 때 까지 아담 부부는 세 가지 측면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분명한 사명 또는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아내 이브와 행복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아담의 삶은 행복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바탕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과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족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올바른 일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때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일과 관계의 측면에서 몇 가지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있다 하더라도 지나친 성공추구의 욕망으로 극심한 피곤(burn-out)을 느끼고 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보다는 자신과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일은 사람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일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생이란 일과 관계의 양대 축에 의해 지탱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복잡한 사회 속에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회사나 사회를 위해 무슨 기여를 하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이나 열정과는 무관하게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지위를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삶의 목표와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은 인생은 마치 선장 없는 배가 바다 위를 목적지 없이 표류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행히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서 만족을 누리고 있지만, 지나친 일의 부담으로 가족과 여가를 위해 사용하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80 시간 이상씩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밤늦게 퇴근하면서 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휴가철이 되어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밀린 일을 처리하러 직장에 출근하거나 해외출장으로 대신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가리켜 일중독자(workaholic)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사람들 간의 관계단절은 일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가정 내에서 부부간,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는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악화되어 있습니다. 남편은 직장 일로, 아이들은 학교 공부로 귀가하는 시간이 늦어 가족이 함께 모여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매우 어렵습니다. 직장 내에서도 지나친 경쟁 조장으로 직원 간에 인간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늘날의 직장은 일만 있고, 인간적인 관계는 상실된 기형적인 조직으로 자라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과학문명의 발전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20세기 포스터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시간이 갈수록 영혼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지 않고 이 땅에서의 유한한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삶의 우선순위를 결정해 주는 절대가치를 잃어버리고 미약한 자신의 능력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숙명적인 인간의 실존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영원 보다는 현재의 관점에서 인생을 바라보게 되고,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위해 권력과 황금과 섹스를 탐닉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현대인은 다시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첫째, 자신의 일에서 새로운 사명과 비전을 찾아야 합니다. 둘째, 일과 여가, 돈과 가정 사이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지혜로워져야 합니다. 넷째, 현재 보다는 영원의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와 같이 올바른 사명의 발견과 관계의 회복을 통해 잃어버린 행복을 다시 되찾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Monday, May 22, 2006

느헤미야의 위기


우리가 선한 결심을 하고 그 일을 하다 보면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일이 점차 진행되어 가면서 내부적으로 힘이 달리기 시작하고, 외부적으로 방해하는 세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기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위기는 대개 일의 중간 단계쯤에서 생겨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무너진 성벽을 건축할 때의 일입니다. 처음 성벽을 건축할 때는 유대인들이 모두 힘을 내어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느헤미야와 유대인을 비웃으며 유대인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만큼 형편없다고 비꼬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그들의 비난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성벽 건축에 전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을 절반 쯤 완성했을 때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 동안 주변에서 지켜보면서 말로서만 조롱과 비방하던 이방 민족들이 성이 점차 모습을 갖추어 감에 따라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내부에서도 처음 성을 건축할 때의 용기와 자신감은 사라지고 성벽 공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피곤과 좌절감과 느끼고, 이방 민족의 침공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성벽 공사에 참가하지 않고 주변에 사는 유대인들은 느헤미야에게 열 차례나 찾아 와서 성벽 건축을 중단하고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오는 것이 안전하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들은 위와 같은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까? 처음에는 의욕을 가지고 일을 시작했으나 일이 중간쯤 진행되었을 때 주변의 방해와 심신의 피곤함으로 도중에 포기한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그 때 어떻게 이 문제에 대처했습니까? 그리고 그 방법이 성공을 했습니까? 아니면 실패했습니까?

느헤미야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느헤미야는 먼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서 4장 4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적들의 침입에 대비한 철저한 준비를 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유대인들은 파수꾼을 두어 밤낮으로 방비를 했습니다. 그들의 절반은 성벽 공사에 참가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진 채 적들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그리고 성벽 공사에 참가하는 자도 한 손에는 병기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일을 했습니다.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옷도 벗지 아니한 채 잠을 자고, 물을 길으러 갈 때도 무기를 들고 갔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의 철저한 준비와 노력으로 성벽 건축은 오십이일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했던 이방 사람들이 성벽 건축이 성공한 것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6장 16절에 보면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광야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바로의 군대의 추격을 이겨내야 했고, 홍해라는 지형적 장애도 극복해야 했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는 갈증과 굶주림, 독사와 아말렉의 공격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고라와 그 일당들의 반란을 이겨내야 했습니다. 성경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가나안의 견고한 성벽과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장대함에 놀라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적들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국 가나안 진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 같은 상황 하에서 적들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신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자신이 처한 복잡하고, 어려운 현실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낙심하는 분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느헤미야나 여호수아가 가지고 있던 문제보다 더 크고 중대하십니까? 그 문제가 여러분의 생명을 위협할 만큼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느헤미야와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를 맞이했을 때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가지고 그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내어 놓고 그 분의 도우심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1)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크신 사랑을 신뢰하고,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갈 때, 주님이 우리들에게 마음의 기쁨과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마음을 새롭게 하라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마음은 분명히 우리 속에 있으면서 다른 어떤 것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살아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올바르면 우리의 모든 생활이 즐겁습니다. 성경 잠언 4장 23절에 보면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메마르지 않는 샘물을 그 마음속에 가진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맑은 생수가 솟아 나와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에게 까지 영적 갈증을 해소시켜 줍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 15절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좋은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땅에 비유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상태는 신체의 건강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많은 자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로 인해 건강을 잃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마음이 평안한 자는 건강 상태도 좋아집니다. 잠언 15장 13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고, 잠언 17장 22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건물을 짓기도 하고, 비행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마음을 통해 우리는 음식을 만들고 즐거운 시간 또는 불행한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은 마치 큰 유조선을 움직이는 작은 스크루와 같습니다. 유조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방향을 선회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배의 선미에 달려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스크루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은 정결하지 못합니다.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모두 악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창세기 6장 5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을 때는 언제나 악한 냄새를 풍기게 마련입니다. 아직 세상에 물들지 않은 어린이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그 속에 악한 생각들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8장 21절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존 오웬(sin and temptation)목사는 “성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내부에 배반세력이 있으면 그 성은 적들로부터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와 같은 배반세력이 우리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 마음은 모든 유혹 앞에 쉽게 넘어가고 결국은 그들의 발 앞에 굴복하고 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은 물속에 잠겨 진 빙산과 비슷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의 이면에는 물속에 잠긴 빙산처럼 드러나지 않는 숨겨진 동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광대한 우주와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마음을 지으신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며 그 분만이 온전히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3편 15절에는 “저는 일반의 마음을 지으시며 저희 모든 행사를 감찰하시는 자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내면의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시며 그것을 바꾸는데 전문가이십니다. 시편 51편 10절에서 다윗왕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들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주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바랄 때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통해 우리의 상한 심령을 치료하여 주십니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 중에 상한 심령으로 괴로워하는 분이 계신다면 주님께로 나와서 그 분의 위로함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