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ly 21, 2006

그리스도인의 기쁨(Joyful Christian)

현대인은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살던 당시와 오늘날을 비교하면 너무 많은 것이 변해서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 비해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물질문명의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람들의 생활을 깊숙이 들여다 보면 현대인이나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대를 막론하고 삶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물질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훨씬 부유하게 살고 있지만 옛날사람들에 비해 그만큼 더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현대인 중에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위해 밤낮으로 일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주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물질적으로는 여전히 부족해 하고,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변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지만 옛날에 비해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은 더욱 늘어 가고,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늘 마음 한편에 외로움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한 현대인은 여전히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게 두려워 하며 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잠시 동안 기쁨을 누릴 때도 있습니다. 잠시 동안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잘 되어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뿐이고, 얼마 안가서 새로운 고민거리로 괴로와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근심을 잊어 버리기 위해 술이나 약물, 섹스, 도박, 쇼핑 등에 탐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사람의 오감을 일시적으로 만족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독증세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나중에 똑 같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하고, 결국 사람의 몸과 정신을 망치게 만듭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볼 때 현대인은 예수님 시대에 비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실상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진정한 행복과 기쁨은 누리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대체 인간이 그토록 원하는 진정한 기쁨은 어디에서 구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솔로몬처럼 부유하고, 지식이 많고, 왕과 같이 높은 신분이 되면 그와 같은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올림픽 선수 처럼 건강한 몸을 가지거나, 영화배우처럼 아름다운 몸을 가질 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와 같이 되면 우리는 잠시 동안 기쁨을 누릴 수는 있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다른 기쁨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 진정한 기쁨을 2000년 전 로마의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지내던 한 유대인 죄수가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고한 죄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어 생사를 판가름 짓는 마지막 재판을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우리가 그토록 누리기를 원하는 진정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 들과 함께 그 죄수가 처해 있던 상황과 그가 누리고 있던 진정한 기쁨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알아 보려고 합니다.

바울의 기쁨의 내용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오늘 읽은 본문은 사도 바울이 로마의 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가 개척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빌립보 교인들과는 특별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실라가 유럽대륙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빌립보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빌립대왕을 기념하여 만들어진 도시로서 지금의 터키 지역인 소아시아지역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자세한 경위가 나와 있습니다. 당초 바울 일행은 아시아 지역에 먼저 복음을 전할 예정이었으나 성령이 이를 못하게 여러 번 막었습니다. 그 대신 마케도냐 사람 하나가 밤에 환상 중에 나타나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도착해서 안식일에 기도처를 구하러 나갔다가 강가에서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서 그녀와 가족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는데 그녀는 다른 사람 밑에서 돈을 벌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울과 그 일행을 보고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러날을 그렇게 좇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내었습니다.

그런데 그로 인해 여종의 주인이 자기 돈줄이 끊어진 것을 알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억울한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을 찢기고 매로 많이 맞은 후에 발을 착고에 채인 후 감옥에 갇혔습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서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는데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하고 그를 말렸습니다. 그 일로 인해 간수와 그 가족들이 모두 세례를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이런 우연곡절을 거쳐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바울이 그 곳을 떠나 선교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여러 차례 물질로 후원하였고, 특별히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에바브로디도라는 성도를 통해 헌금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을 뻔 하다 간신히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로 돌려 보내면서 그를 통해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를 써서 보낸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 그가 처해 있던 형편을 살펴 봅시다.

1)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 생사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별도의 독립된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지내야 했으며 자신의 생사에 대해 자신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초대 교회로부터 전해 오는 구전에 따르면 바울은 후에 로마의 감옥에서 목이 베임을 당하는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2) 바울은 이 편지를 쓰는 동안에 몸이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몸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1장에서 자신의 육체적 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병을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라고 불렀습니다. 그 명칭은 그 병이 주는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병이 떠나가도록 주님께 세 번 씩이나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은 바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도 이 고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3) 바울은 자신이 믿었던 일부 사람으로 부터도 배신을 당한 상태였습니다. 빌립보서 1장 17절에 보면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 바울은 이 때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몸이 매우 쇠약해진 상황이었고, 누가와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도와 주기는 하였지만 감옥안에서 겨울의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 처한 상황은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기쁨을 누릴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처럼 자신보다 훨씬 자유롭고, 건강하며, 물질적으로 풍부한 형편에 있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빌립보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 보면 아시겠지만 이 편지 어느 곳에도 바울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슬퍼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에게 베풀어 준 도움에 감사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진정한 기쁨의 비밀을 전해주고 싶어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 형편에 관계없이 진정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기쁨은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이하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쁨은 곧 성령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보면 기쁨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사랑 다음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평생에 복음을 전하느라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가 그 고통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우리와 똑 같이 슬픈 일을 당하면 슬퍼하고, 채찍을 맞았을 때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와 달랐던 것은 그와 같은 고통의 순간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와 같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바울은 구원의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들이 구원의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신 때가 마지막으로 언제였습니까? 우리가 죄에 대해 가슴이 무디어진 것 처럼 구원의 감격에 대해서도 무디어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 가졌던 옛사랑의 기쁨을 되살려 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까지 그 분의 몸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라진 교회는 죽은 교회와 같습니다. 이런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내가 구원의 감격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대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우리에게 주신 촛대를 다른 사람들에게 옮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원래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일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 믿는 자를 잡으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장 13절 이하에서 예수 믿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고,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은혜로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의 사명을 받았으니 그 은혜가 큰 것입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는 신용카드 빚으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 빚을 갚아 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는 자살하는 대신 그를 찾아가서 수 백 번 절이라도 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그와 같은 죄사함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닙니까? 예수 믿기 전에 나의 모습을 잊어 버린 것이 아닙니까?

저는 모태신앙이 아니라 철이 든 후 예수를 믿은 사람입니다. 중학교 때 처음 교회를 나온 후에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해 많이 방황하였습니다. 성당에도 다니고, 불교에도 한동안 심취했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쾌락을 좇아 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영접하기 전의 나의 모습은 바울이 말한 대로 죄인 중의 괴수와 같았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오늘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꾼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이 기쁨을 저는 여러분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이 기쁨을 저는 앞으로 평생 잊지 않고 간직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린 분이 계시다면 오늘 주님께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 기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바울은 기도의 응답을 통해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6절 및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빌립보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24절에서 예수님은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욕을 위해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주님은 반드시 응답하여 주십니다. 때때로 그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질병을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하였으나 주님은 이를 들으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만이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됩니다. 때때로 'No'가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좀처럼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다려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십여년 전에 미국에 경제학 공부를 하러 오던 때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저는 30대 중반에 목회자가 되려는 생각을 자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경을 읽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회사에서 퇴근하면 잠자기 전까지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 보고 응답을 받으면 직장을 그만 두고 목회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 먹고 회사생활을 충실히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회사에서 보내 주는 유학을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34살이었는데 부랴 부랴 토플시험 치고 지원을 했으나 첫해에는 선발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선발에서 떨어진 후 한 달 정도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 더 기회가 있어서 마음을 고쳐 먹고 다시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승진을 해서 부서를 옮기게 되었는데 그 부서에는 저 말고 이미 유학을 준비 중인 사람이 5명이 더 있었습니다. 저는 순서로 보면 6등이 되지요. 더욱 문제인 것은 우리 과에 전입고참이 있어서 저는 과에서도 2등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매년 제가 속해 있는 부서에서 유학을 올 수 있는 사람은 많아야 세 명이고 한 과에서 두 명을 보내 줄 가능성은 100%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에 그냥 도와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아내는 기도를 해 보더니만 반드시 갈 수 있다고 자신있어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회사 사정을 알기에 아내의 말을 100%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저도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고 최악의 경우 유학을 오지 못하더라도 크게 상심할 일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와 직장 신우회에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해 말 저에게 중요한 임무가 떨어지고 저는 그 일을 연말까지 무사히 완수했습니다.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에 휴가를 내고 가족과 함께 설악산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휴가를 간 날 회사에서 특별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때 제가 다니던 직장에서는 연말에 보너스를 현금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이 퇴근을 하지 않고 연말분위기에 휩쓸려 직장에서 카드를 쳤습니다. 그런데 그 해는 다른 해와 달리 그 날 저녁에 회사 내 한 부서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누군가 훔쳐 가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 사건은 처음에는 쉬쉬하면서 조용히 지나가려다 우연히 윗 선에서 아시고 남대문 경찰서에 본격적으로 조사를 의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회사에서 카드를 친 사람들을 인사조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 부서에서 유학지원을 위해 기다리고 있던 제2순위자가 다른 부서로 전보 발령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 일로 제가 5순위자로 한 등급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우리 과에 있는 전입 고참으로 인해 과내 2순위이기 때문에 유학은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인사부서에서 자리가 비어 적임자를 물색하는데 우리 과에 전입고참을 불러 갔습니다. 그 때 전입고참이 인사부서로 발령가면서 저에게 한 말이 아직 기억이 납니다. "이번에 김대리가 유학을 가게 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이루어지는 것이 심상치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제가 과에서 1순위가 되고 결국 유학을 올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제가 그 때 유학 온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진짜 대단한 것은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10년 동안 연단하시면서 겸손을 배우게 하시고, 주변 사람들을 돌아볼 마음을 가지게 하시고 이렇게 주의 종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제가 30대 중반에 간절히 기도하였던 일을 주님께서는 잊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10년이 지난 올해 저를 신학 공부할 수 있도록 보내 주셨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아내의 마음도 변하게 해 주셨습니다. 10년 전에는 주님이 제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아서 주님의 뜻을 잘 알 수 없었는데 지금은 왜 주님께서 저에게 침묵하셨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이 기도하는 내용 중에 주님께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먼 훗날에 주님의 귀한 뜻을 알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훗날 주님을 뵈올 때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대로 '쉬지말고 기도하는"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바울은 전도의 결실로 인해 기쁨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영혼구원에 대한 사명을 쉽게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12절에서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면서 로마감옥에 갇혀서도 전도를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었던 양의 비유를 통해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 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전도의 결실로 인한 기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새들백교회를 담임하고 계시는 릭워렌 목사는 자신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자기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 순간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릭 목사님의 아버지도 목사님이셨는데 평생 교회개척을 위해 노력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암에 걸려 병상에서 돌아 가실 때에도 전도만 생각하셨는데 임종직전에는 주변 사람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시고 정신이 들 때 마다 손을 허공으로 저어시며 'one more for Jesus"(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님께로)를 계속 되풀이하셨다고 합니다.

저도 이 곳에 와서 한 가정을 마음에 두고 전도를 진행 중인데 그 분의 마음이 잘 열리지 않아서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곳 샬롯이 복음을 전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기는 하지만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데 항상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끝으로, 바울은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인해 기쁨을 누렸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0절과 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말하면서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4장 8절에서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말하시면서 천국이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예비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3절까지 말씀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를 위하여 천국에 처소를 마련한 후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이십니까? 여러분의 지내 온 인생이 어떠했습니까? 야곱이 나이 들어 요셉의 초청으로 그의 아들들과 애굽으로 건넌 간 후 애굽의 바로를 만났습니다. 그때 바로가 야곱에게 너의 인생이 어떠했느냐고 물었을 때 내 인생이 '험악'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천국 시민으로서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보다 더욱 힘든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에게는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힘든 여정이 끝나는 날 우리는 천국 문 앞에서 우리의 사랑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순리입니다.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는 생각입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우리들을 두렵게 만듭니다.
또 하나의 태도는 그와 같은 두려움을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고서는 새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태아가 어미의 배 속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것으로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성경은 그와 같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책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주님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내가 다른 모든 것은 못 믿어도 주님 말씀 만은 믿는다는 굳은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힘든 노정을 기쁘게 이겨내시고 마침내 천국을 소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주님! 오늘 바울 사도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에 대해 살펴 보았습니다. 바울은 육체적 질병과, 믿었던 사람으로 부터의 배반과, 감옥에 갇혀 신체의 자유를 구속받는 상황에서도 구원의 은혜로 인하여, 기도의 응답을 통하여, 전도의 결실을 통하여, 천국에 대한 소망을 통하여 이 땅이 줄 수 없는 하늘로부터 오는 신령한 기쁨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오늘 머리 숙인 저희들도 바울처럼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06.07.27 남부한인장로교회 수요예배 설교
본문: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제목: 그리스도인의 기쁨(Joyful Christian)